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(문단 편집) === 배경 === 고려 충정왕 2년(1350), [[왜구]]가 고성, 죽림, 거제를 침략하자 합포의 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이 이를 격퇴해 적 3백여 명을 죽였다. 이후 [[고려 말 왜구의 침입]]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장 40여 년간 총 3백여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략해 고려 민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. 고려는 일본 정부에게 왜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, 일본 정부는 그럴 힘이 없었다. 당시 일본은 [[남북조시대(일본)|남북조 시대]]라는 전란에 휘말렸고 특히 규슈 일대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.[* 심지어 규슈 일대의 왜구들이 수도 [[교토]] 인근 [[키나이]](畿内)까지 약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.] 이렇듯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친 [[왜구]]는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대마도([[쓰시마 섬]])를 거점으로 삼았다. 본래 대마도 땅이 매우 척박해 식량 생산이 요원해서 고려와 교역해 식량을 구입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, [[여몽전쟁]]과 [[원나라의 일본원정]] 이후 교역량이 줄어들자 왜구의 선봉 역할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. 이에 고려 [[우왕]] 13년(1387) [[관음포 전투]]에서 전선 47척으로 왜구의 전선 120척을 괴멸시키는 등 왜구를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[[정지(고려)|정지]]는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다. >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,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,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.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,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일기도(壹岐島)[* 지금의 나가사키현에 있는 [[이키섬]]]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.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,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.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.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(1281)[* 1281년은 충렬왕 7년인데, 여몽연합군의 [[원나라의 일본원정#S-5|2차 일본 원정]]을 가리킨다.]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(漢兵)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.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,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. 이후 [[왜구]]는 [[황산대첩]]에서 [[이성계]]에게 괴멸된 뒤 수그러들었지만, 고려 [[창왕]] 즉위년(1388) 고려가 [[제2차 요동정벌]]을 단행하느라 부산한 틈을 타 [[양광도]]를 휩쓸었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. 이에 [[정지(고려)|정지]]가 [[위화도 회군]] 직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, 부원수 김종연,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, 전주목사 김용균, 양광도 상원수 도흥,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해 왜구를 진압했다. 이후 위화도 회군의 주역 세력은 [[우왕]]을 폐위하고 [[창왕]]을 옹립한 뒤 분위기를 쇄신할 겸 한반도를 빈번하게 침략하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